돌고래의 식물 유영

식물과 감정계


식물에게 감정이 있을까. 식물에게 감정이나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더라도 그것은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인 내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 정서와는 다를 거다. 식물은 우리가 윤곽과 형태, 개체성을 가지고 세상의 사물과 기호, 다른 삶을 시각적으로 정보화하고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은 우리 시각 정보의 재료가 되는 빛을 자신의 방식으로 지각한다. 빛은 식물이 어떻게 자랄지 결정하는 기호다. 그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에 반사되어 상을 맺는 방식으로 식물에게 지각되지는 않겠지만, 식물도 나름대로 기호의 세계 속에서 베이트슨 같은 인류학자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하는 삶의 꼴이다. 도끼로 나무를 치는 사람이 눈-팔-도끼-시선-나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계인 것처럼 말이다. 어디서 어디까지 환경이고 어디서 어디까지 개체인지, 무엇이 의미이고 무엇이 지각이나 느낌인지 결정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화분들이 놓인 책상에 앉아 얼음을 동동 띄운 컵에 녹차를 마실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만의 것은 아니다. 녹차-얼음-컵-손-눈-식물-책상-...의 계와 감정.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누군가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아팠다. 검은 안개가 머리 속에 있었다. 두피를 마사지하니 조금 나아졌지만 평소보다 소리가 크게 들리고 몸 이곳저곳의 근육이 더 많이 쑤시듯 아팠다. 모든 감각의 볼륨을 노브를 돌려서 키워둔 것처럼. 잠을 더 자고 싶기도 했지만 날카로운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 널어둔 빨래와 어지러운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트위터를 잠깐 켰는데 타임라인에 정보가 너무 많아서 머리가 깨질듯 아프고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그러다 책상에 화분을 가득 채운 사람의 트윗을 발견하곤 스마트폰을 껐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방을 이렇게 둔 상태로는 불안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서 심호흡을 하고 무척 넓어져 있는 머릿 속의 시야를 눈 앞의 빨래로 줄였다. 빨래를 내 방식대로 분류해서 침대 위에 던져두고 빨랫대를 접었다. 협탁에 가득 찬 책을 책꽂이에 옮겨 꽂았다. 책상을 비우기 위해서 책상에 있던 전기포트를 뽑아서 주방에 옮겼다. 그리고 안 쓰는 도구들을 접어서 치워뒀다. 컵도 싱크대로 치우고 나서 보니 책상에 먼지가 가득해서 닦았다. 그리고 화분들을 올려두었다. 달력으로 모니터를 높이기 위해 깔아둔 두꺼운 책들을 가리고 나니 그림 같은 워크스테이션이 완성되어 있었다. 맘이 좀 나아졌다. 침대 근처 선반에 자주 안 쓰는 물건을 아래쪽 찬장에 옮겼다. 자주 쓰는 물건만 남기고 햇반을 종이 프레임과 상자에서 꺼내 탑처럼 쌓아두었다. 분주하게 청소를 하고 나니 오전이 거의 다 가 있었다. 어제 삶아둔 펜네 파스타와 구운 야채를 꺼내다가 시저 드레싱을 쳐서 먹었다.

식물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식물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 있기도 하다. 식물도 우리처럼 빛과 물, 양분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물과 달리 기관 몇 군데가 절단된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도 아니다. 절단된 기관은 흙이나 물에서 충분한 조건만 가지면 다른 개체가 되기도 한다. 식물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는 식물을 생명을 지닌 개체로서 바라보게 된다. 식물은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생명활동을 잘 유지하고 있는 식물의 아름다움에서 그의 생명이 지니고 있는 어떤 체계성과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난 그 체계성을 지키고 싶고 그의 건강과 생장에 도움이 되고 싶다. 나는 그를 돌보고 싶어진다. 식물은 혼자서는 스스로에게 물을 주거나 위치를 바꿀 수 없다. 도시의 화분에 심어진 식물이 아니라면 그런 걱정은 없을 것이다. 식물들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진화하고 번식하면서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지역적 환경에 적합한 방식의 삶의 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길들여진 식물은 개량된 품종으로 그가 살고 있던 세계와 다른 세계들로 옮겨지면서, 그가 원래 살고 있던 세계에는 있었지만 지금 그가 있는 곳에는 없는 것들을 보충받아야 한다. 인간은 그 보충 활동, 돌봄에서 기쁨을 얻는다. 식물은 인간의 공간에서 조금은 무력한 사물이다. 그에게 빛과 물, 거름을 주는 활동은 그런 점에서 일방적이기도 하고 권력의 비대칭성을 느끼게 한다. 난 그 이상한 감각이 싫기도 하지만 많은 순간 그 감각을 잊고 있기도 한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순간 식물은 자신이 지닌 미적이고 생물적인 체계성을 통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식물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방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가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다. 삶에는 식물이 자라나는 것 같은 어떤 패턴과 체계성이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식물을 돌본다고 해서 식물이 잘 자라거나 말라 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환경과 상황에서 나는 여러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 어쩌면 삶은 식물을 돌보는 것처럼 여러 상황 속에서 방법을 찾아나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노브를 돌려서 감각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처럼 감정의 노브를 갖고 싶다. 감정이 곤두박질치거나 어딘가로 달려나갈 때 노브를 시계반대방향으로 감아서 제동을 걸고 싶다. 그것이 직경 1cm, 높이 2cm 정도의 플라스틱 노브와 연결된 회로의 방식과 같을 수 없더라도, 비슷한 기능을 가지는 어떤 계를 만들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난 슬프고 망가지는 기분이 들 때 트위터의 비공개 리스트인 H1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봇들이 올리는 영상을 본다. 하지만 다른 계를 식물들과 만들 수 있으면 어떨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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