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의 식물 유영

필로덴드론 드림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무엇이 될 것인가? 좌파들은 그런 얘기를 자주 한다. 세상이 변할 기미가 보이면 이 틈에 혁명하자.. 뭐 이런 계획에서 나오는 흥분인거 같다. 코로나 이후? 물론 세계는 바뀔 것이다. 하지만 미투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세계가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되었는가 지난 5년을 돌아보면 그 변화는 영화나 드라마의 서사처럼 스펙터클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일상에 촘촘히 심어진 사회세계들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변화는 그런 의미에서 큰 그림 속에서는 느리고 지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의 장면이 바뀌어 나간다.

퀴어이론 수업에서 루인님 주도로 어떻게 탈코운동가 여성이 화장실에서 패싱의 문제를 겪는지, 그리고 그 장면이 어떻게 트랜스젠더와 화장실에 관한 정치와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이루어질 수 있는 연대, 제휴, 협상들을 묻어버리는 방식으로 약자들이 약자들에 대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너무 깊은 감정의 골이 웹의 분산된 공간들에 수천의 방식으로 패여있다. 파편화된 정보와 구호들이 넘쳐나고 무엇보다도 이용자들의 감응으로 가득하다. 이 싸움을 전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어진 다른 가능성의 공간들이 있다면 찾아가야 한다. 이 공간을 새로이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싶다. 이 공간이 전부라고 생각하기를 나부터 그만두어야 한다.

미국에서 한 흑인 남성이 비무장인 상태로 진압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과잉진압에 의해 질식사했다. 경찰이 무고한 자를 살인한 것이다. 경찰이 종종 무해하고 무능한 남성으로 재현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미국은 정말 상상하기 어렵게 폭력적이고 우울한 나라인 것 같다. 무엇이 경찰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총기? 자본? 인종차별적 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 장면은 교차성 정치가 남긴 시민사회의 위대한 유산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인 여성들이 흑인 시위대를 과잉 진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흑인 시위대는 낙오한 백인 남성 경찰관이 린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나는 여기서 약자성의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역사가 기억으로 남은 시민사회의 역량을 발견한다. 또한 공권력의 장치에서 떨어져 나온 일개 신체로 전락한 백인 남성이 그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막아서는 흑인 시위대의 모습에서 모든 부당한 폭력에 대한 연대를 발견하기도 한다.

꼴꼴꼴... 컵에 물을 붓고 얼렸다. 두꺼운 유리컵의 반은 얼음이다. 여기에 끓는 녹찻물을 부었는데 금방 시원해지지 않는다. 컵은 온도차를 견뎌낸다.

나와 ㅎ이 한 쌍의 필로덴드론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길을 걷다가 포유동물의 섹스가 별로라는 얘기를 나눴다. 난 물고기처럼 자갈 틈에 알을 낳으면 정자를 뿌리는 방식이면 좋겠다고 했다. ㅎ은 식물처럼 수분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비디오드롬의 어느 장면에서처럼 배의 살점을 갈라 숭하지 않은 성기를 꺼내 인간이 낳는 알을 수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과장된 몸짓을 써가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정말 식물이라면. 식물의 잠이라는 오디오북을 들었다. 자신을 화분에 심은 여성의 이야기. 내 살이 선인장의 조직 같아서 뜯어내면 끈적하고 축축한 세포의 다발로 뜯기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하면 싫어할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기도 한다. 왜 싫을까. 뜯어진 살점이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할까. 식물은 뜯겨서 땅에 꽂히면 새로운 개체가 된다. 식물은 어떤 점에서 개미 같은 군집 생명같다. 인간은 너무 한 신체를 근거로 한 개체성 내지 소위 개인성에 너무 집착한다. 인간은 사실 거대한 오버마인드의 수족으로서~~(생략...)

식물수다에 응모한 사연으로 물꽂이를 받았다. 어느 날 나는 물꽂이에 손가락을 꽂아두고 잤다. 작은 새우들이 헤엄치는 물에서 손가락은 갈라졌다. 손가락 끝에서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가? 손가락은 일기를 쓰는 힘이다. 손가락이 키보드와 펜과 만나면 글이 자라난다. 물꽂이를 한 손가락에서는 줄기가 자라날 것이다. 처음엔 하얀 뿌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옆에서 몰래 잎들과 잔뿌리가 돋아나면서 긴 줄기가 올라올 것이다. 거기에는 글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문단이 되고 꿈은 워드프로세서가 될 것이다.

튜링을 식물로 만들고 싶다. 가챠게임에서 수집용 아이템으로 여러 사물의 체계를 미소녀로 번역하듯 사람들을 식물로 번역하고 싶다. ㅎ의 옆에서 넙적하게 자라는 콩고가 되고 싶다.

마음의 그늘엔 늘 무거운 족쇄가 따라다닌다. 미래의 삶을 걱정하게 된다. 학기가 끝나가면서 몸이 무척 망가진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정말 글을 그만 읽을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싶다. 사람을 만나서 조사하는 법에 관한 책을 여름동안 읽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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